아지노모토-미각의 제국과 글로벌리제이션
「味の素」――味覚の帝国と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
저자: 조던 샌드 (Jordan Sand)
1960년생. 현재 Georgetown University의 일본사 교수이다. Tokyo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Columbia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주로 근대사와 문화사, 건축사 등에 대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옮긴이: 박삼헌
이 글은 Jordan Sand 교수의 article인 "A Short History of MSG"와 저서 "제국일본의 생활공간"의 일부를 읽고 작성한 것이다.
참고로 "제국일본의 생활공간"이라는 책은 그가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383p), 원래 영어 원서 없이 일본어로만 출판된 책으로, "帝国日本の生活空間"(2015, 이와나미서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것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2장, 아지노모토-미각의 제국과 글로벌리제이션은 그의 article "A Short History of MSG: Good Science, Bad Science, and Taste Cultures"(2014)에 기반을 두어 가필 수정한 것이다.
이케다 기쿠나에 (池田菊苗, 1864-1936)는 일본의 화학자로 조미료로 활용되는 monosodium glutamate (MSG)를 개발하였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유기화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던 그는 값싸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영양공급원을 개발하여 국민들의 식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이미 독일에서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 (Justus von Liebig)라는 화학자에 의해서 소고기 엑기스 (beef extract)를 이용하여 독일군을 위해서 활용된 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유기화학 분야는 급증하는 노동자 인구나 군인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키를 가진 분야로 큰 각광을 받았으며, 이케다 기쿠나에도 이러한 관점에서 영향을 받아 일본 국민의 식생활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08년 일본의 음식에서 기존의 단맛, 신만, 짠맛, 쓴맛과는 다른 다섯 번째의 맛을 발견해 내고, 이를 "Umami" 즉 감칠맛이라고 명명했다.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특허를 받은 monosodium glutamate는 1909년부터는 Suzuki Chemical Company에 의해 "아지노모토"라는 상품명으로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아지노모토는 "예측가능성, 효율성, 편리함, 위생과 영양에 대한 과학적 보장"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점들은 메이지 시대의 국가적 목표인 문명개화, 계몽, 부국강병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지노모토는 초기 4년 시장에서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초기에는 간장 brewers나 식당들을 주요 고객으로 설정해 판매를 시도했지만 실적 부진으로 Suzuki Chemical Company는 타겟층을 가정주부들로 과감하게 바꿨다.
근대기의 새로운 가정 문화는 메이지 근대 국가를 후견하는 엘리트 층에게 있어서 그들만의 class identity의 중요 구성 요소로서 등장했다. 부르주아 가정주부들은 위생, 과학적 영양, 효율성과 같은 근대적인 요소들을 추구하였고, 무지한 하인들보다는 직접 그들의 가족들을 위하여 부엌에서 일하며 전통적인 요소들을 대체해 갔다.
하지만 이들에게조차 MSG는 비싼 재료로, "home size" 1병이 당시 밀가루 10파운드의 가격과 맞먹었다. 당시의 광고에 표현된 회사의 로고에는 모던한 가정주부를 상징하는 그림, 즉 하얀색 앞치마를 두르고 서양식 헤어스타일을 한 여성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향수가 담긴 병과 같은 모양의 유리병은 가정주부들에게 모던하면서도 전문적으로 요리를 만든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에 "식도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던 유명작가 "무라이 겐사이 (村井弦斎)"의 호평이 등장하는 광고는 아지노모토의 상품에 신뢰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무라이 겐사이의 시각에서도 아지노모토의 MSG는 부엌에서 시작되는 식문화의 근대화, 과학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등 교육을 받은 여자 학생들에게 직접 홍보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장래에 부르주아 가정을 이끌 주역들로 근대 교육을 받은 만큼 아지노모토에게는 이상적 타깃이었다. 회사는 1922년부터 1937년 사이에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한 모든 학생들에게 아지노모토의 샘플상품과 요리책을 보내 홍보함으로써 시간, 노력, 비용적인 측면에 있어서 경제적이며, 근대적인 삶, 혹은 문화생활과는 분리할 수 없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러한 홍보에 힘입어 아지노모토의 MSG는 육수를 만듦에 있어서 주재료인 kelp (다시다), bonito flakes (가쓰오부시)의 대체품으로 인식되었다.
아지노모토는 말 그대로 일본의 가정을 근대화시키는 과학적 산물로서 가정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수용되었지만, 음식점의 요리사의 입장에서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이 하얀 가루를 그들의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결국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음식점에서조차도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심지어 부엌에서만이 아니라 식탁 테이블에 거치되어 간장이나 소금처럼 수시로 개인의 음식에 넣어 먹는 것으로서 일본의 부엌과 식탁을 장악했다.
1918년에 비해 1931년 가와사키 공장에서 생산된 양은 85톤에서 1,077톤으로 약 12배 증가했다. 당시 도시 지역에서의 판매량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아지노모토의 마케팅 대상은 향촌 지역이나 식민지를 비롯한 해외시장으로 확장되었다. 타이완에서는 일본과는 반대의 루트로 MSG가 확산되었다. 즉 대중들의 공간에서 먼저 확산되어 가정으로 전파되는 루트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와는 위상을 가졌다. 즉 일본에서는 과학, 위생, 영양, 효율 등 근대적인 레토릭으로 포장되어 부르주아 가정에 침투한 고가의 상품이었다면, 대만에서는 거리의 음식, 가정의 음식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값싸고 보통의 존재였다. 현재까지도 대만의 국민 1인당 MSG 사용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만을 발판으로 아지노모토는 남중국으로까지도 전파되었으나 초기에는 장벽이 존재했다. 1918년에는 상하이, 1922년에는 광동 지역에서 타이완과 비슷하게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였지만, 아지노모토는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일 뿐이었기에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의 일부 중산층과 식당에서만 사용될 뿐, 난징이나 다른 도시 지역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23년 설립된 중국 회사 (Tien Chu, 天廚)는 그들의 제품을 홍보하면서 아지노모토를 모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자극하였다.
1925년에 스즈키 상점은 다롄에 공장을 설립하였고, 만주국 정부의 수립 이후에는 만주의 시장에도 진출하고자 했다. 또한 1931년에는 경성 영업소를 세우고 조선의 사정에 맞춘 판매 촉진책을 구성하여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1926년 겨우 29톤이었던 조선 수출은 1935년에 136톤으로 증가했다. 1936년에는 경쟁사의 제품인 "아사히아지(旭味)도 조선 시장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선인은 1년에 약 5.9g로 아주 적은 양을 소비할 뿐이었다. 이는 1931년 오사카의 일본인이 소비한 34g이나 대만인의 69g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였다. 조던 샌드 교수는 이러한 적은 수치가 외식을 즐겨하는 대만인들의 식문화, 그리고 된장이나 간장을 대부분 가내 생산하는 조선의 전통적 문화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중화요리 속에서 널리 활용되었던 글루타민산 나트륨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중국인 이민자 (diaspora)들을 따라서 아지노모토나 Tien Chu의 제품이 홍콩, 싱가포르, 미국 서부 해안으로까지 전파되는 데에 일조하였고, 미국에 있는 중화요리점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판매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1년까지 타이완보다도 많은 구매량을 보여준다. 이는 식품 가공 분야의 성장과도 관계가 있다. 당시 군으로부터의 기술 이전으로 식품 가공 분야에 있어서 미국은 최선진국이었지만 군대로 공급되는 가공식품에는 풍미가 부족했기에 글루타민산 나트륨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런 이유로 1869년에 창립된 미국의 캠벨사는 1920-30년대부터 일본산 글루타민산 나트륨을 사용하였고, 아지노모토에게 있어서 중요 수요처 중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일반 가정에서, 타이완, 중국에서는 식당에서, 미국에서는 중국식당뿐만 아니라 가공식품산업에서 활용되어, 각각의 식문화에 따라 다른 위치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적 환경이 바뀌면서 MSG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부터 화학제품의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MSG에 대한 의심도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화 요리점 증후군 (Chinese Restaurant Syndrom)이 등장한 것도 이 당시였다. 메릴랜드 주의 중국계 미국인 의사인 로버트 호우 만 쿼크 (Robert Ho Man Kwok)가 1968년 4월 "뉴잉글랜드 의학 잡지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보낸 편지에는 미국에 있는 중화요리점에서 외식할 때부터 마비나 심한 심장의 두근거림 증상을 느낀다는 경험이 적혀있었고, 이 잡지는 이를 "중화요리점 증후군"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이후에도 다른 의사들이 같은 증상을 언급하는 편지나 보고가 잇따르면서 이 용어가 정착되었고, 그 원인은 대체로 글루타민산 나트륨으로 지적되었다.
그 외에도 FDA가 시클라민산 나트륨 (Cyclamate, 일종의 인공감미료) 사용의 금지를 발표하고 며칠 후인 1969년 10월 23일, 식품(기아), 영양, 보건에 관한 백악관 회의 (White House Conference on Food, Nutrition, and Health, 1969년 닉슨 대통령에 이어, 2022년 바이든 대통령이 53년 만에 이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 내의 기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판단 하에 2030년까지 기아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국가적 목표가 설정되었으며, 기아뿐만 아니라 식량 안보 문제 등도 다루었다)는 아이들의 음식에는 MSG를 사용하지 말 것을 권장하였다. 그 근거는 쥐에 투여한 MSG가 뇌손상을 유발한다는 실험 결과였다. 추가적으로 닉슨 대통령은 FDA에게 모든 화학 첨가물의 안전성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MSG에 대한 금지나 규제가 추가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기에, 이후로도 MSG의 안정성, 건강에 대한 영향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이 외에도 식품산업에서 식품의 안정성에 대한 문제가 소비의 흐름을 주도했다. 1968년 일본에서는 Kanemi oil (카네미 오일 유증사건 - 카네미라는 회사의 식용유에서 PCB라는 화학 물질이 검출된 사고) 사고도 있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시클라민산 나트륨을 비롯한 식품 첨가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이었지만, MSG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대하였다. 아지노모토는 여전히 세계를 선도하는 MSG생산 기업이었고, 일본 식품 산업계에서 손꼽히는 회사였다 (오히려 일본 내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아지노모토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견해가 퍼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리제이션이 심화되어 가고 전 세계적으로 MSG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증대되고 건강에 대한 유해성과 관련된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면서 MSG의 소비도 영향을 받았다. 1983년에 설립된 한국 소비자보호시민연합은 1986년부터 국내 MSG 소비량을 줄이는 운동을 전개했다.
아지노모토는 자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자사의 제품에 천연 조미료를 추가한다거나, 글루타민산 나트륨, 즉 화학조미료라는 용어를 대체하기 위해 "감칠맛"을 강조하는 전략을 계획해 감칠맛을 "유익한 과학의 언어(the language of beneficial science)"로 인정받고자 했다. 학계에 대한 후원, 마케팅, 천연조미료 판매 등 전방위적인 노력으로 인해 부정적 이미지가 희석되어 가면서 "우마미" 즉 감칠맛은 일본적 특질에 기반하여 유익한 과학으로서 포장되어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여러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MSG는 현대인의 식문화나 소비 습관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저자는 특히 주요 소비국들이 태평양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일본제국의 산업, 이민, 정보, 물류 네트워크의 확장의 결과와의 연관성을 제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서유럽, 인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MSG의 소비와 무관한 점이 그 근거인 것이다. 결국 일본 제국의 영향권이 곧 "아지노모토의 영향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는 일본의 제국하에 있던 정치, 문화 경험의 다양성이 반영되어 각 나라에서는 다른 역사의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는 1943년 글루타민산 나트륨의 판매가 종료되었고, 1955년이 되어서야 국내기업인 미원(味元)과 미풍(味風)이 그 자리를 차지해 글루타민산 나트륨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원 - 현 대상그룹, 미풍 - 현 CJ제일제당, 삼성의 제일제당이 미풍을 인수한 후 일본 아지노모토와의 기술제휴를 내세워 미원이 주도하는 조미료시장을 공략하려는 마케팅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2023년 2월 27일 CJ제일제당과 아지노모토 사이에 MSG를 둘러싼 소송의 결과가 보도되어 눈길을 끌었다.)
조던 샌드 교수가 인용한 정근식 교수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두 회사는 제품명에서 동경과 혐오라는 식민지 이후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 "미(味)"라는 한자를 제외하고 새로운 한국어 명칭을 가진 다목적 조미료를 제조함으로써 아지노모토로부터 이어진 식민지 유산을 극복했다.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학과학사, 2006)"의 5장 맛의 제국, 광고, 식민지적 유산
오키나와에서는 1930년대까지 글루타민산 나트륨의 소비는 미미했으나 종전 후 미군정의 시대에는 수입이 증가해서 1955년에는 그 소비가 30배나 증가했고, 일본으로 반환되는 1968년에는 250배가 증가해 있었다. 미군과 오키나와 사람들의 소비를 구분해서 분석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수입된 글루타민산 나트륨은 오키나와 내에서 대체로 소비되었을 것이고,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오키나와의 식문화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처럼 유기화학을 통한 식품첨가물의 과학화, 근대화로 탄생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제국의 확장과 함께 전파된 글루타민산 나트륨은 이미 각지의 식생활과 결합하여 문화 속에 자리 잡았다. 한편으로는 환경 위기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소비자로부터 외면받기도 했으나, "감칠맛"이라는 용어를 활용한 업계의 캠페인으로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저자는 일상품의 역사적 궤적에 주목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과학, 식문화 사이의 관계성을 조명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동아시아에 전파된 식품 및 식문화 속에 담겨 있는 식민주의적 성격을 조명하는 주영하의 "동아시아 식품산업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 깃코망형 간장, 아지노모토, 그리고 인스턴트라면"이라는 논문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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